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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중앙일보] 네팔에 심은 한국의 꿈② 베니에 씨앗 뿌리다

【서울=뉴시스】하도겸 박사의 ‘히말라야 이야기’ <31>

지난해 가을 일이다. 내일 출발하는 NGO 나마스떼코리아 현지봉사활동에 필요한 마지막 점검 미팅을 끝내고 밤 11시가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바쁜 일과로 정작 내 짐을 챙길 시간이 없었다. 시간은 어느덧 새벽 2시를 훌쩍 지나 잘 시간을 놓쳐버렸지만, 이미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서울 도심에 사는 사람이 인천공항에서 출발하는 오전 9시 비행기를 타기는 쉽지 않다. 짐까지 보내려면 6시까지는 공항에 도착해야 한다. 초등학교 시절의 소풍도 아닌데 비행기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거의 뜬 눈으로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해야 한다. 어차피 그럴 바에야 잠을 충분히 잘 수 없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단체 짐들을 챙기며 빠진 것이 있는지 마지막 점검을 하고자 이 짐, 저 짐 열어본다. 괜한 노파심 때문이다.
 
실 평수 6평도 안 되는 지하 단칸방을 가득 채운 20㎏이 넘는 묵직한 짐들은 무려 30여 개나 됐다. 좁지만 그래도 평소에는 친구 네 명이 둘러앉아서 차 한 잔 정도는 할 수 있는 방인데도 지금은 겨우 몸 하나 누울 자리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곳이 됐다. 모두 네팔 베니 부근의 장애인 초등학교나 병원에 기부할 물품과 우리가 현지에서 사용해야 할 약품이다. 기부 물품은 신발·문방구·가방·축구공·옷가지로부터 사진기와 노트북까지 여러 회원에게 기부받은 것이다. 그래도 짐들을 비집고 들어가서 어떻게든 새우잠이라도 잘 수 있도록 시도한다. 남들이 보면 마치 겨울잠을 자는 곰 같다고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혼자 껄껄하고 실없이 웃어본다.
  
올해 운 좋게 2012년 행정안전부 공익활동지원을 처음으로 받게 됐다. 후원 회원이었던 까닭에 없는 휴가까지 탈탈 털어 모아 함께 가기로 했다. 마침 추석 연휴에다가 담당하고 있는 교육과정이 끝나고, 다른 과정이 시작되기 전이라 휴가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네팔을 6번이나 다녀온 경험도 있고 네팔 관련 강의도 여러 차례 한 적이 있어 봉사단 단장이라는 무거운 감투까지 쓰게 됐다. 그러다 보니 이 많은 짐까지 자발적으로 떠안게 된 듯하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어느새 깜빡 잠이 들었다.
 
잠시 후 새벽의 정적을 깨는 소리에 다행스럽게도 일어났다. 예약해 놓은 1톤 트럭이 비좁은 골목길을 뚫고 지나 집 앞까지 들어온 것이다. 트럭을 타고 온 단원 두세 명과 함께 한참 짐을 실은 후 동트는 새벽을 가르면서 트럭은 공항으로 향했다. 항공사 카운터에 초과하는 짐을 사정사정해서 보낸 후 비행기에 올라서야 겨우 눈을 붙인다. 얼마나 잤는지도 모르게 어느새 몸은 카트만두 트리뷰반 공항에서 준비된 버스에 짐을 옮기고 있었다. 그곳 버스에서 자고 또 잤다. 어느덧 인구 2만의 작은 도시이지만, 네팔 3대 도시인 베니의 허름한 게스트하우스 옥상에서 히말라야의 일출을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와! 마차푸차레다! 아무도 정복하지 못했다는 히말라야 영봉을 바라보면서 드디어 베니에서의 봉사활동 첫날이 시작됐다.
 
베니시 국립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희망 반 걱정 반이었다. 이름만 베니에 하나뿐인 국립병원이다. 의사 세 명이 교대로 근무하고 의료품을 보관할 냉장고도 하나 없다. 병실 역시 마찬가지다. 비에 젖은 것 같은 녹슨 철제 침대가 덩그러니 한두 개 놓여 있을 뿐 환자들이 제대로 덮을만한 담요조차 없다. ‘이런 곳에서 우리가 의료봉사를 정말 제대로 잘할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앞섰다. 게다가 최근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동의보감’으로 우리의 전통의학 한의학이 더욱 알려졌다고 해도 그건 선진국에서 얘기가 아닌가! 한국의 수도가 서울인지도 잘 모르는 네팔에서 이 나라에도 없는 침을 이용한 우리 한방치료에 환자들이 과연 많이 올까?
 
어느새 병원 정문 10m 앞까지 왔는데도 입구 근처는 휑하다. ‘아! 어떡한다.’ 이렇게 환자들이 안 올까 싶어서 네팔에 오기 전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한네팔가족협회 회장단을 만났다. 전 회장에게 베니시 정부와 상공회의소 등과 접촉해서 현지 신문에 홍보까지 부탁한 적도 있다. ‘분명 지난주 신문에 광고했다고 들었는데도 이 정도로 사람이 없나?’라고 생각하며 마당으로 들어가는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8시밖에 안 됐는데 사람들이 병원 마당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빨리 진료를 받으려고 일찍부터 온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뒤따라왔던 사람들이 사실은 모두 진료를 받으러 온 것이었다. 현지 자원봉사자들에게 물어보니 정식진료 3시간 전인 아침 7시부터 줄이 생겼다고 한다. 진료를 받으려고 이른 새벽부터 출발한 사람들도 있었다. 산속에 있는 마을에서는 아예 어젯밤부터 별을 보며 걸어서 좀 전에 도착했다고 한다. 의료가 열악한 곳에서 무료진료를 한다니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가족을 통해 소식을 듣고 수도 카트만두에서 10시간이나 걸려 버스를 타고 왔다는 할머니도 있다.
 
환자들이 계속해서 밀려들자 미리 만들어놓은 번호표를 배포했다. 그러는 사이 새롭게 지은 임시 건물 병실에서는 우리 한의사 세명과 자원봉사자들이 약품을 나누고 교실바닥과 같은 곳에 장판과 비닐, 매트를 깔며 임시 침상을 만들었다. 임시 건물 병동은 아직 완성되지 않아 천정에서 시멘트 가루가 떨어지기까지 했다. 수력발전에 필요한 물이 많은 우기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기임에도 전력 사정은 여전히 안 좋아 진료 중에도 몇 번이나 정전이 됐다. 그나마 낮이어서 진료하는데 커다란 어려움은 없었지만, 강렬한 직사광선을 막고자 두터운 커튼을 사서 달은 까닭에 실내등을 켜기 위해 석유를 넣고 발전기까지 돌려야 했다.
 
우리 한의사들이 사흘간 정식으로 진료한 환자는 무려 570명이나 된다. 그러나 접수한 환자의 숫자는 이미 980명이나 됐다. 파스만 받고 돌아간 사람들까지 합치면 1000여명이 훌쩍 넘어간다. 끝없이 밀려드는 환자 때문에 한의사들은 녹초가 됐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최선을 다해 성심으로 진료해나갔다. 그에 질세라 자원봉사자들도 문진표를 작성하고 침도 뽑고 약도 나눠주는 등 열심이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한정된 의사보다 환자들이 너무 많아 어쩔 수 없이 먼 데서 온 환자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안타까워 파스라도 붙여주고 나눠주고자 했지만, 나중에는 약품이 떨어져 그냥 보내야 했다.
 
그렇지만 생전 처음 보는 침을 딱 한 번 맞고는 다 나았다고 좋아하는 노인들을 보며 커다란 보람을 느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단원 전원이 처음으로 온 히말라야의 나라 네팔에서 함께 감동을 나눴다. 스스로 한일에 대해 가슴 깊이 뿌듯하게 여기며 커다란 자부심을 느꼈다. 이는 단순한 개인 한 사람의 일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이름을 내건 민간 외교관으로서의 커다란 자부심이기도 하다. 한국과 네팔의 친선교류에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열심히 봉사한 단원들 모두 스스로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참가한 한 학생이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울먹이며 말한다. “선생님! 저렇게 못살고 더럽고 힘들게 살면서도 애들은 왜 항상 웃어요?” 귀국 후 게임을 거의 안 하게 됐다는 얘기, 적은 용돈을 모아 선물을 사서 네팔로 보냈다는 소식 등 맑고 밝은 얘기가 들려온다. 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될 때쯤이면 네팔에 심은 우리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땀과 희망은 결실을 보아 꼭 ‘코리안 드림’을 이루게 할 거라고 소망한다.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galm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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